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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의 제2의 인생

by 권오갑변호사 2015. 11. 25.

아버지의 제2의 인생




2011년 말은 나에게 힘든 시간이자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2011. 10. 28. 서울 아산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사실 아버지는 이미 10여일전에 안동에 나가셨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길가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식사를 잘 못하시고 잘 걷지 못하여 안동성소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가족들과 나는 단지 감기 몸살로 알고 있었고 병원에서도 이상이 없는데 식사만 잘 하면 된다는 식의 진단을 하였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 상황진전이 없자 서울에 있던 형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먼저 휴직계를 내고 목요일 저녁 안동의 병원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식욕부진이라는 진단과 달리 상황은 훨씬 심각해 보였고 다음날 급히 서울로 이송을 결정하였다. 나는 형이 내려가는 날 저녁 형과 같이 내려가려고 하였으나 서울에서의 병원을 알아보고 일을 처리하기로 하고 서울에서 남았다. 나는 그저 서울에서 입원치료하면 낳을 병으로 생각했다. 그 다음날 나는 형으로부터 서울로 이송한다는 연락을 받고 먼저 서울강남성심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서 병원을 찾아 갔으나 서울의 대형병원의 응급실 대부분이 그렇듯이 만원이었고 위중하게 보이는 환자 조차도 응급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알아보던 중 아산병원이 커서 응급실에 다소 여유가 있다고 생각되어 아산병원으로 오도록 하였다.  

 

금요일오후에 도착한 아버지는 나를 알아보았고 간단한 대화도 하였으며 의식도 있었다. 의사들은 곧바로 검사를 하였으나 검사결과는 오후8시경이 되어야 나왔다. 의사의 진단은 폐혈증이었다. 즉 흔히 피가 썩어서 각종 장기의 기능을 상실시켜서 사망케하는 무서운 질병으로 사망률이 70%라고 말하였다. 


의사들은 이러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 즉 발병병원균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나에게 증상을 낱낱이 물었으나 서울에 있던 나는 잘 알 수가 없었고 가족들에게 물어도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의사는 아주 절망적인 의견을 피력하였고 병원균을 알지 못하면 그 예후는 좋지 않다고 말하였다. 





각종 가건물을 채취하여 분석에 들어갔으나 아버지의 상태는 곧바로 악화되었다. 그날 저녁 이미 아버지는 검사과정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의식이 없었다. 특히 척수를 빼낼 때는 몹시 힘들어 하였고 나는 의사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를 몇 번이고 물었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상태는 급격이 악화되었는데 먼저 신체중 가장 민감한 부분인 신장이 기능을 상실하고 그 다음은 심장의 기능이 상실되었고 이어서 폐가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 안동에서 고생을 한 형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 그날 저녁은 내가 병원을 지켰다.

 

그날 저녁 응급실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급격히 떨어지는 혈압에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의사들은 상태를 체크하고 각종 기계와 투약을 하였다. 그런 상태에서도 이미 조절기능을 상실한 변이 무의식적으로 나왔다.





담당 인턴 여의사는 아무런 불평이나 인상하나 쓰지 않고서 스스로 이를 치웠다. 내가 하겠다고 하자 그 여의사는 단지 옆에서 거들어 달라고 했을 뿐 자신이 모든 것을 닦아내고 옷을 입히고 시트를 갈았다. 여의사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으나 참으로 환자를 사랑으로 대하였다. 척수를 뺄 때 나는 그 인턴여의사에게 물었다.힘들지 않냐고? 그 여의사는 “편한 일을 선택하였다면 이런 길을 가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심각한 환자가 밀려들자 그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정신없이 응급처치를 하였다.


응급실의 당직 의사는 나에게 서류를 내밀며 서명을 요구하였다. 그 내용은 위급한 상태에 있고 이로 인한 위험에 대해 듣고 승낙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어보고 따질 여유도 없이 그냥 서명을 모두 해 주었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꼭 살려달라고 말하였다. 아직은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실 나이가 아니라며.......


그날 저녁12시경이 되자 중환자실의 병실이 나서 급하게 아버지를 중환자실로 이동시켰다. 마치 텔레비전에서 보는 의사같이 환자를 밀면서 복도를 뛰었다. 그만큼 시간이 없었고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심장혈관으로는 심장을 살리기 위해서 강화제를 투약하고 신장에는 투석기를 부착하였으며 소면은 소변줄을 삽입하여 처리하였고 각종 기능을 체크하는 센서는 머리와 손 등에 부착하여 온몸이 줄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흡이 되지 않자 삽관을 하였다. 새벽 나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여 면회를 하도록 하였다. 나는 오래 살기 힘들거라는 생각에 의사에게 미리 삽관하기 전에 아버지가 한마디라도 할 수 있도록 먼저 연락을 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급한 병원에서는 삽관을 하겠다는 연락만을 하고서 곧바로 시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상태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편, 병원에서는 몸에서 채취한 가건물에서 균을 배양하여 이를 확인하여 항생제를 투여하려고 하였으나 균이 배양되는데 4-5일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말하였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더욱 가쁜 숨을 내리 쉬었고 신장은 기능을 상실하여 몸이 붓기 시작하였다. 의사는 투석기를 빨리 돌리면 붓기는 빠지나 혈압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나와 형이 번갈아 가면서 하루 2번 허용되는 중환자실을 찾아갔으나 균을 배양하여 진단할 시간을 아버지는 버틸 수 없는 듯 보였다. 


형과 나는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쯔쯔가무시병에 대한 항생제 투약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담당의사는 균을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마냥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항생제를 조금씩 투약하여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4일이 지날 때 의사는 쯔쯔가무시병으로 진단하고 본격적인 항생제를 투여하였다. 그 결과 염증수치는 반으로 낮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기능을 상실한 신장이 일부 기능을 회복하여 소변이 나오기 시작하였고 가쁜 호흡도 다소 안정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투석기의 사용을 줄였고 점차 심장강화제의 투약도 줄였다. 아버지의 의식도 일부 회복되었고 사람을 알 아 보는 듯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와서 2인병실을 거쳐서 일반병실로 옮겼다. 그때까지 입원한지 약2주 정도가 지날 때 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람을 잘 알 아 보지 못하였고 식사나 거동도 어려웠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가족들을 알아보게 되었고 입에 대지도 않던 식사도 하기 시작하였다.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든지 아버지는 횡설수설하고 병원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6인 병실로 옮겨 휠체어에 타서 이동을 하게 되자 병원측이 퇴원을 요구하였고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아버지를 형집으로 모셔서 1주일 정도 요양을 하였고 그 다음은 우리집에서 1주일 요양을 하였다. 그렇게 되자 아버지는 겨우 걸어 다니고 대소변을 가릴 정도가 되었다. 이때까지 형수님과 집사람이 간호하느라 고생이 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안동의 고향집으로 어머니와 함께 내려 가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만 늦게 서울에 왔어도 아버지를 살릴 수 없었는지 모른다. 의사라면 환자의 상태를 보고 그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안동에서 그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너무 방치, 지체하여 악화시킨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안동지역에서 이미 이러한 쯔쯔가무시병(진드기가 물면 딱지가 생기고 10여일의 잠복기를 거쳐서 고열과 구토 등의 증상이 생김)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도 안동의 병원에서 증상을 보고서도 이를 체크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차에 모시고 오면서 물어보았다. 땅 한평도 없이 모란에 이사 와서 나이40세가 되기도 전에 11식구의 가장이 됐는데 걱정이 않되었느냐고?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말하셨다. “왜 걱정이 않됐냐고?”, 차창을 보면서 그 다음 말씀은 없었다.


나는 여느 집 처럼 풍족하게 먹고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족을 버리지 않은 것 만이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여 편안한 여생을 보내시기를 .....


끝으로 헌신적인 치료를 한 서울아산병원 관계자 여러분들게께 감사를 드리고 특히 의사로서 모범을 보여 주신 입원 당일 저녁 인턴 의사분과 중환자실을 지키신 의사선생님, 적절한 치료와 정확한 판단으로 생명을 살리신 담당 주치의 허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2012. 2. 8.


                    권 오 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