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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워낭소리와 집으로

by 권오갑변호사 2015. 11. 10.

워낭소리와 집으로






2009. 2. 초 토요일 아이들과 아내와 ‘워낭소리’를 봤다.

 

신혼초에 아내와 ‘집으로’를 봤던 생각이 났다. 두 영화는 시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었고 우리네가 살아온 인생 또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영화이기에 더욱 공감이 가는 면이 있었고 가슴 찡한 것이 남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1999년 결혼 후 거의 영화를 보지 못하다가 2003년 경인가 아이를 친척에게 맡기고 테크노마트에 있는 영화관에서 ‘집으로’라는 영화를 봤다. 영화시작후 나는 흐르는 눈물을 몰래 훔치다가 드디어 주체를 하지 못하고 엉엉울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보던 아내는 나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영화후반부에 가서 나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내를 보았다. 





집사람은 그동안 냉정을 잃지 않고 보다가 후반부에 가서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두사람 사이에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정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왜 울었는지 과거로 돌아와 보자, 나는 가난한 집에서 많은 가족 속에서 살았으면서도 어쩌면 운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때 할머니가 밥을 해 주셨다. 


70을 훌쩍 넘긴 할머니는 손자가 행여 굶을 까봐 주말마다 나물이며 감자 등 음식재료와 간장, 고추장, 된장 등 여러 보따리를 싸서 나에게 들고 가라고 했다. 





할머니가 이렇게 한 것은 시장에서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창피스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매번 투정을 부렸다. 할머니는 딱박골 골짜기에서 아침 일찍 학교 갔다가 저녁 늦게 오는 손자를 위해 밥을 하셨고 연탄을 갈았다. 


추운 겨울도 마다하지 않고 맨손으로 빨래도 해 주셨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 갔고 방학 때면 시골에 갔지만 막상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저녁 식사 후 ‘배고프지’ 하시며 고구마나 사과 등 간식을 가져 오셔서 먹으라고 하였다(할머니는 소식을 하였고 조미료는 드시기 않았으며 음식을 조금씩 자주 드셨기 때문에 건강하게 사시다가 88세에 돌아가셨다).





이때 나는 저녁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먹기 싫다며 텔레비전만 보거나 놀러갔다. 오래만에 보는 손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이때도 할머니가 나의 곁에 영원히 계실줄 알았고 할머니 마음을 이해할 어떤 준비도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어떻게 결혼하였고 살아오셨는지, 어떤것이 궁굼하고 부족한지, 고민은 어떤 것이 있는지 그 어떤 것 조차 묻지 않았다. 





내가 할머니에 대한 생각 때문에 울었던, 반면 아내는 그 철없는 손자 때문에 울었던 것이다.


이 철없던 손자(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가를 가서 아버지가 되고서야 철이 아주 조금 들었고 나의 잘못을 깊게 뉘우치게 되었다. 이미 때는 늦었지만 하염없는 눈물만이 지나간 세월을 말할 뿐이었다. 





언제 시간이 되면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영화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만 삼천포로 ----


워낭소리는 봉화에서 제작된 영화라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대화가 자주 듣던 말투이고 그리고 흔히 하는 넉두리 라서 더욱 친근감이 갔다. 





할머니가 소를 보고서 소나 자신이 할아버지 잘못 만나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엄마로부터 가끔 듣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의 아버지가 보셔야 더 깊은 회상에 잠길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한번 시간을 내어서 영화를 보면 가슴이 후련할 것 같다. 가급적 부모님께도 권유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