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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남해여행기

by 권오갑변호사 2015. 12. 8.

남해여행기



이번 여름의 휴가에는 남해안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우선 시골집에 들러서 농사일을 거들어 주고서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2011. 7. 31. 집에 도착해 보니 형님이 미리 와서 일을 거의 마쳐 놓아서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날 저녁 식구들과 안동에 가서 매운탕을 먹는 것으로 내가 할 일을 대신했다. 8. 2. 처가에 들러서 장인어른과 함께 남해를 향해 달렸다. 거가대교를 통과해 거제도 구조라해변에 도착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잡았다. 가는 도중 엄청난 대역사의 현장인 거가 대교를 보았다.




<거가대교의 중간인 가덕도에서 해저터널을 뒤로 하고>

 

그리고서 거제도에 도착후 곧바로 김영삼 대통령의 생가를 들렀다. 아들과 딸은 청와대집무실을 옮겨놓은 책상에 앉아 마치 대통령이 된 것 처럼 사진을 찍었다. 김전 대통령은 중학교때 대통령의 꿈을 꾸었으니 우리 아들딸이라고 되지 않을 법도 없지 않을까, 김 전 대통령이 중학교 때 우리나라가 내각제 였으면 수상을 꿈꿨을 테고 그러면 역사는 달라졌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 대통령의 자리만을 꿈꿨을 뿐 나라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는 생각해 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어서 옥포해전을 기념해서 이순신기념 공원을 들렸다. 빈약한 자료였지만 그래도 둘러보았다. 그곳에 눈에 뛰는 구절이 들어왔다. 당시 일본의 장군 와카자키 야스히루(脇坂安治)는 이순신에게 패하고서 나는 성급했고 그는 침착했다. ”(잘 생각이 나지 않음)라는 글을 남겨서 이순신장군을 칭송했다고 한다.


이어서 저녁에 찾아간 것이 옥이민박이었다. 나는 여행전에 미리 인터넷을 보고 예약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인터넷의 사진과 달리 마치 반지하방처럼 햇빛도 들어오지 않았고 습도가 높아 칙칙했다. 아이들은 아연질색했지만 환불이 어렵다고 하여 그냥 달래서 잠을 자기로 하였다. 맛있는 것을 사 주겠다고 말하고서


그날 저녁 구조라 해변의 회집에서 회를 먹었는데 회맛도 별로였다. 많은 횟감과 반찬중 유일하게 맛있었다고 생각이 든 것은 회나 조개종류가 아니라 멸치젖밖에 없었다. 구조라해변은 해수욕장도 있지만 외도와 가장 가까워서 내가 숙소로 예약을 했던 곳이다


그곳에는 구조라산성도 있었는데 전혀 개발을 하지 않아서 반쯤 파손된 채로 버려져 있었다. 그렇게 좋은 경치에 위치한 산성을 방치해 둔 거제도행정당국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가까운 곳인 줄 알고서 바람의 언덕이라는 곳을 구경갔는데 구조라에서 생각보다 멀었다. 저녁이라서 아쉬웠지만 시원한 경치는 볼 수 있었다.


다음날 김밥을 간단히 먹으려고 했으나 김밥집 문을 열지 않아서 인근 횟집 식당 앞을 지나가는데 아주머니가 아침식사하고 가라고 권하여 들어갔다. 해물된장을 시켜 먹었는데 맛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이런 좋은 재료를 가지고 이렇게 밖에 맛을 못내나라며 자신의 음식솜씨를 자랑하려고 했는지 음식집 아줌마의 음식솜씨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인지 모르는 야릇한 말을 했다


이렇게 밥을 먹고 외도, 해금강을 가는 유람선을 타고 해금강을 둘러보고 외도에 도착했다. 유람선의 선장은 해금강을 격찬하였는데 해금강 자체는 수려한 경치이기는 하지만 주위를 더 구경시키지 않고 그것만을 보여주고 엄청난 경치를 보여 주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선장이 야속했다. 해금강의 경치보다 유람선에서 들었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른 어느 여자 가수목소리만 기억에 남았다(돌아오는 고속도로휴게소에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 CD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해금강 전경>

 

외도는 이창호라는 분이 낚시를 왔다가 태풍을 만나 그곳에서 민박을 하게 되면서 외도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는 처음 8가구가 있던 섬을 사들여서 부인과 개척한 곳인데 관람 마지막 코스에 개발 당시의 사진이 있었다. 그 섬의 역사를 통해 이창호는 섬을 하나의 관광코스로 주변 경치와 조화를 이루도록 개발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던 것이다


현재 성인1인당 1시간 관람코스에 8000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후손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나는 개발이 된 외도전면의 식물원 보다 뒤편의 절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외도 뒷 절경>


당장은 어렵더라도 외도 뒤편의 섬도 있는데 외도에서 뒷 섬과 연결하는 교량을 설치하면 섬 자체의 절경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도를 보고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둘러보았다. 장인어른은 미리 보았다고 하였으나 아이들에게 교육이 될까 싶어서 둘러보기로 하였다. 꽤 넓은 공간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사실 나도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고 아이들도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 했다. 그리고서 통영에 있는 미륵산의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 갔다. 가는 중간에 배가 고파서 도로변에서 촌국수라고 쓰여진 식당을 찾았다. 생각보다 맛이 있었다


촌국수는 서울사람들이 먹는 잔치국수와 비슷한데 국수의 면발이 다르고 육수도 좀 달라서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케이블카였는데 엄청난 사람이 모여 들어서 1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미륵산 정상에 오르니 거제도와 통영시를 한눈에 볼 수 있었고 경치도 좋았다. 더운 여름에 1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미륵산 케이블카를 내려와 곧바로 순천의 갈대숲을 보기 위해 달렸다. 저녁노을과 함께 보면 더 멋있다는 말을 들어서 인지 빨리 달렸으나 이미 해는 저물어 갔다. 그러나 한가로운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지는 노을도 볼 만 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서 마련한 푸조3008은 윗천장을 드러내고 하늘을 볼 수 있어서 더욱 멋진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한 드라이브 풍광을 선사했다. 순천만에 도착하여 민박집을 찾으려다가 주차장 바로 옆에 있는 흑두루미민박집을 찾아가 방이 있는지 물었다. 다행이 방이 1개 남아 있었는데 넓은 방을 10만원에 주었다. 너무 운이 좋았다. 아이들도 만족해 했다


그 민박집 뒤에 대대밭이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그곳에서 짱뚱어전골을 시켜 먹었다. 짱뚱어 전골은 마치 미꾸라지와 비슷하여 추어탕과 같은 맛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훨씬 고소하고 맛있었다. 나는 음식점의 손맛을 보는데 그 기준은 주된 메뉴가 아니라 밑 반찬의 솜씨로 평가한다. 그런데 보통 유명관광지 주변의 음식점이 맛이 별로 없는 것과 달리 그곳에는 짱뚱어전골뿐 아니라 밑반찬도 맛있었고 더구나 대대포라는 막걸리가 더 일품이었다


대대포는 그곳 쌀로 빗었다는 술로 시에서 위스키를 본따서 ‘Blue Label'이라는 상표를 붙여서 개발, 판매하고 있었는데 맛이 달지 않고 깔끔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 내가 몰래 나가서 그집 식당 문을 닫기 직전 1병을 더 사와서 마셨다. 그날 저녁 술에 취한 내가 아들과 함께 방안에서 술래 잡기를 했다. 아들은 다음날 아침 나에게 마치 술취한 곰 같이 잡아 먹으려 날뛰었다고 표현했다


830전에 순천 생태공원이 입장하면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민박집 주인의 말에 서둘러 들어갔다(사실 보니, 공무원이 출근하지 못하여 무단입장을 한 것임). 순천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용산 전망대인데 용산이라는 산에 설치한 거라서 그렇게 이름 지은 듯 했다. 전망대로 가는 길이 갈대숲사이를 지나도록 해 놓아서 갯벌과 갈대 사이에 사는 게와 짱뚱어를 볼 수 있었다


그곳 안내판에는 짱뚱어가 동면을 하여 잠둥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짱뚱어의 유래라고 하였다. 순천만을 볼 수 있는 전망대로 가는 길이 다소 멀었고 그날 너무 더워서 고생을 했다. 전망대에 올라서 망원경으로 살펴보기도 했다. 다른 관광지와 달리 망원경에는 동전을 넣지 않아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작은 배려로 보였다.


그리고 나의 예상과 달리 전망대에는 어떤 음식물도 팔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오염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는 3층으로 되어 있는데 위층에서 보고 내려오다가 나와 아들딸이 먼저 1층으로 내려 왔다. 그런데 1층에서 어느 아가씨가 카메라를 자신의 한손에 잡고 멀리 팔을 뻗어서 자신을 찍으려고 했다. 그것을 본 내가 먼저 찍어주고 나도 아이들과 같이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사진을 찍어 드릴까요?’라고 먼저 말을 건넸다.

 



<순천만 전경>

 

내가 사진을 찍어 주고 우리 가족도 그 여자의 도움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여자가 올라가자 아들은 아내에게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고 고자질 했다. 내가 어이가 없어하자, 아들은 엄마에게 아빠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이상한 목소리로)사진을 찍어드릴까요?하며 말했잖아요!’라며 흉내까지 내었다. 얼굴이 빨간 것은 햇빛에 탓기 때문인데 정말 억울했다. 나는 순천만 전망대에서 내려올 때 까지 내내 아내에게 시달렸다.

 

순천만을 뒤로 하고 낙안읍성민속마을로 행했다. 가는 길목에서 벌교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꼬막정식을 맛보고 가기로 했다. 꼬막정식1호라고 쓰여진 간판이 있는 식당에 들렸는데 식당이 가득차 있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식당안에는 주인인 듯 보이는 사람이 유인촌 장관으로부터 받은 상장과 기타 허정무, 박지성과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


그런데 유명한 사진들보다 실제 맛은 별로 였다. 꼬막정식(1인당 15000)에는 꼬막전, 꼬막무침, 생꼬막, 꼬막된장이 주된 메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신선한 재료여서 먹을 만 했지만 다른 밑반찬은 별로 맛이 없었다. 아무튼 별미를 맛보았다. 나는 계산을 위해 카운터로 가서 잘 먹었다고 말하면서 메뉴판에 꼬막한사라 추가에 2000이라는 문구중 사라는 일본말이니 꼬막 한접시 추가에 2000으로 바꾸라며 정중하게 한마디 하고 나왔다.

 

태양이 한참인 때에 낙안읍성마을에 도착하였다. 도착할 무렵 아이들은 아까 그 여자다라며 소리쳤다. 나는 무관심한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낙안읍성이라도 제대로 구경하려면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낙안읍성은 1983년 사적지로 지정된 이래 현재까지 유지보수되어 오고 있다는데 보존상태가 정말 좋았다


일부 개보수한 것을 제외하고 옛날 그대로 였다. 성곽이 마을을 두르고 있고 그 내부에 관아와 객사, 초가 마을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낙안읍성이 위치한 곳이 좌청룡우백호의 풍수가 그대로 적용되는 명당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성곽과 마을의 배치가 계획도시 처럼 거의 한양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다. 나는 제대로 보존도 못한 안동하회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것이 의아했다


순천시의 안목과 노력이 놀라울 따름이었지만 더욱 감명을 받은 것은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실제 거주하는 주민(288120세대)이었고 이들은 단지 민박이나 체험을 위해서 활용하는 것 외에는 그 불편한 초가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문쪽으로 내려가다가 우물을 보았는데 우물안을 보니 식수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청태가 끼지 않고 물이 풍부했다. 성읍내에서 위쪽으로는 개별적으로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하였다는데 재물이 빠져 나간다는 풍수때문이라고 한다. 남문은 서울의 남대문과 같이 화려하고 멋있었다.

 



<남문과 가족들>

 

성곽을 돌다가 내려와서 마을 가운데로 가다가 대장금을 촬영한 곳이 있었고 체험실습을 하는 곳도 보았다. 아들은 새끼를 꼬는 집에 들어가 새끼꼬는 체험을 했다.

 

물놀이를 재촉하는 아이들에게 내일을 약속하며 더운 여름의 성읍구경을 무마시켜가며 보았다. 그리고 보성녹차밭을 구경하기 위해서 보성으로 향했다. 녹차밭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삼나무는 사진에서 보는 그대로 였다


산비탈에 조성된 녹차밭은 일제시대에 재배되던 곳이었는데 6.25때 불타고 황폐된 곳을 장영섭이라는 분이 인수하여 일궛다고 한다. 차밭에서 사진을 찍고 멋진 풍광을 구경하고서 내려 왔는데 압권인 것은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용해서 족욕을 하도록 의자를 개울에 배치해 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고 우리 식구도 이용했다.




<녹차밭에서>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제암산휴양림으로 달렸다. 혹시나 숙소가 남아 있을까 싶어서 물어 보았으나 숙소가 없어서 다시 민박을 찾아서 내려오다가 들풀이라는 민박집에 들어갔다. 마침 방한칸이 남아 있어서 그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저녁을 고민하다가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는데 웅치면에 있는 중흥식육식당으로 가라고 알려 주었다. 식당의 외관은 허름하고 깔끔하지 않았지만 내부는 다소 컸고 손님도 있었다


녹차로 키운 돼지의 삼겹살을 시켜 먹었다. 물론 돼지고기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삼겹살은 매우 맛있었고 다른 밑 반찬도 맛있었다. 식사를 하고서 아내와 나는 내일 캠핑에 필요한 식재료와 막걸리를 사기 위해 인근 슈퍼에 들렀는데 주인이 할아버지 였다. 할아버지는 나이 들어서 슈퍼도 이제 못하겠다며 계산을 우리에게 하라면서 가져온 과자와 품목에 대한 금액을 불러 주었고 우리가 계산해서 돈을 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내가 서울에서 왔다고 하고서 왜 물었느냐고 되물었다. 그 할아버지 왈 너무 잘 생겼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진담을 말했다. 슈퍼를 나오는데 아내는 나보고 한턱 내라고 말했다. 생견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냐면서


들풀민박집은 주인이 정치에 뜻이 있는 듯 했고 카페로 운영하고 있는 곳에 DJ와 노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고 주위에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림은 전문가의 솜씨처럼 보여 물어 보았더니 시동생과 시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시동생은 바로 옆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체험관을 운영한다고 하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친절이 다소 지나치다는 불만을 드러내는 아내의 말을 뒤로 한 채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그 아주머니는 내내 친절하게 대해 주었고 그러면서도 받을 돈은 제대로 받았다. 그리고 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그렇게 애들을 잘 낳았느냐며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참고로 그 아주머니는 21녀를 두었다).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아이들은 냇가로 가 수영을 하루 종일 했다. 텐트를 싣고 온 야영객들은 SUV차량에 마치 한 살림을 차린 듯이 각종 장비와 먹을거리를 싣고 왔다. 야외에서 여가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아는 후배의 말에 의하면 한번 야영의 재미를 들이면 주말만 되면 떠난다고 한다. 이런 말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는 텐트에서 낮잠을 잤다. 이렇게 꿈같은 시간이 흘러서 다시 집으로 향했다.

노대통령의 생가를 들리려 했으나 코스가 맞지 않아 들리지 못하였다. 부족한 부분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2011. 8. 7.

아시아 선수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