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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미국 여행기

by 권오갑변호사 2015. 12. 22.

미국 여행기





드디어 기다리던 2014. 7. 22.이 되었다. 너무 바쁜 일상생활에서 10일간의 휴가를 내게 된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업무상 전화도 받지 않아도 되니 그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아침4시 10분 집을 나와서 미리 예약한 벤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서 7:40 JL기를 타고 일본 나리타를 거쳐 밤새 날아서 그 다음날 11경 미국 케네디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한진광광을 통해 패키지여행에 동행한 여러 가족의 전체 수자는 33명이었다.




<여행코스>


공항에 마중나온 가이드(권기연 이사)를 따라 케네디공항에서 빠져나와서 맨하탄의 센트럴 파크에 먼저 들렀다. 공원 입구에 존레넌이 살았다는 고풍스런 아파트가 있었다. 공원 자체는 이국적이지 않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한국의 공원풍경과 다른 낮선 풍경이었다. 특히 뚱뚱한 사람이 많았고 웃통을 벗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 그랬다. 


공원에서 나와서 브로드웨이를 거쳐서 첼시마켓을 들렸다. 뉴욕중심거리를 지나왔지만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을 자는 바람에 거리구경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첼시마켓은 과거 공장지대였는데 이를 개조하여 시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마켓에서 젤리를 구입했다. 그날 명품가를 들리려 하였으나 너무 피곤한 모습에 다음에 들리기로 하고서 저녁을 먹으로 갔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는데 셀러드는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스테이크는 상당히 맛있었다. 미국 음식이 대체로 짠 편이었고 주로 콜라가 같이 나온다. 그리고 저녁 뉴저지의 호텔(Sheraton Eatontown)에서 첫날을 보냈다. 나는 외국에 가면 꼭 그곳의 술맛을 보는 습관이 있다.


이날도 맥주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호텔에서는 바에서 술을 파는 것 외에 호텔내 상점에서는 술을 팔지 않았다. 그 이유는 뉴저지 등의 일부 주는 상점에서 술을 판매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하여야 하는데 그 면허세가 굉장히 비싸다고 한다. 


그래서 웬만한 상점에서는 술을 갖다 놓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미국은 자유롭고 환락적이고 아무 곳에서나 술을 쉽게 구입하고 마실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는 좀 다른 모습이다.  


다음날(미국 2014. 7. 22.화요일) 곧바로 워싱턴으로 갔다. 가이드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미국의 거리에 대하여 설명했는데 세로는 AVE(에비뉴), 가로는 ST(스트리트), 고속도로는 연방도로가 2자리, 지방도는 연방도로에 1자리를 더 붙인 3자리이고 세로도로가 홀수, 가로도로가 짝수이고 위로 갈수록 높은 숫자, 동부에서 서부로 갈수록 높은 숫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도로 체계는 운전자가 쉽게 도로와 방향,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미국 고속도로에는 고정된 속도측정 카메라가 없지만 경찰이 속도건을 쏜다고 한다. 


이렇게 속도위반을 하면 엄청난 범칙금이 부과된다고 한다. 더 심한 것은 음주운전이나 통상 속도인 100Km/h 보다 훨씬 초과하면 체포되고 범칙금외에 교육을 받아야하고 심지어 다른 주에 가서 정신감정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가이드는 비록 국내에서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외국에 나와서 보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처음이고 각종 첨단제품을 수출하는 나라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하였다(실제 여행중 숙박한 호텔에서는 LG, 삼성 TV가 대부분이었고, 도로에서는 현대차가 상당히 많았다). 뉴욕에 정착한 한인들은 청과상 등에서 상권을 잡고 있다고 하였다. 가이드는 가족과 외국여행을 할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면서‘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숨을 쉬지 않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남에게 줄 것이 없을 때’라고 말했다.    


뉴저지에서 델라웨어 메린랜드주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가이드는 미국의 각 주에 대하여도 설명하였는데 미국에서는 각 주마다 세금정책이 다르다고 한다. 


부가세가 없거나 세율이 낮은 델라웨어주에 쇼핑을 하러 가기 때문에 특히 백화점 세일기간에는 도로가 막힌다고 한다(이런 세일기간의 현상을 가리켜 ‘Black Monday'라고 한다고 한다). 미국의 한주는 한 국가와 다름없기 때문에 각 주마다 이상한 법이 있기도 하는데 심지어 쥐를 잡는데 사냥면허를 받아야 하는 주도 있다고 한다. 


주마다 붙이는 표어가 있는데 뉴 햄프셔주의 차량 번호판에는 "Live Free or Die"적혀 있었다. 뉴저지주의 차량 번호판에는 "Garden State"적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캐나다에서 국경을 넘어 올 때 마주하는 버몬트주(이민국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기서 보내는 노란봉투편지는 이민자들이 영주권을 얻기 위해 그렇게 기다리는 편지라고 한다)도 같은 표어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워싱턴에 도착하면서 가이드는 미국의 독립과정과 워싱턴에 대해 일반적인 설명을 하였다. 초기에 14개 주가 연방에 가입하였고 처음 수도를 뉴욕으로 하였다가 남북의 중간지점인 워싱턴에 자리를 정하였다. 


수도 이름은 “Washington D.C(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인데 워싱턴은 미국 독립을 이끈 장군이자 초대 대통령이름이고 D는 District(직할) 의 약자, C는 Columbia의 약자인데 콜럼비아를 넣은 것은 더 위대한 도시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워싱턴을 설계한 자는 프랑스 건축가였다고 한다(프랑스인 피에르 샤를 랑팡의 설계로 건설된 계획도시로서 1790년 국회의 동의를 얻어 미국의 수도로 지정).


국회의사당의 첨탑의 여신은 동쪽을 향하고 있고 취임식은 그 뒤편에서 거행한다고 한다. 백악관 명칭의 유래를 2가지를 설명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남북 전쟁에서 백악관이 불에 타고 난 뒤 흰색으로 도색하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 더 맞는 설이라고 한다. 


백악관을 보기 전에 차량이 멈춘 곳은 TV에서 자주 보는 상무부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도로 주변에는 잡상인들이 있었다. 의사당 맞은 편에 있는 탑은 남북전쟁 때문에 건설이 중단되는 바람에 중단부분부터 탑의 색깔이 달랐다.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을 들렸다. 그곳에 한국코너도 있는데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스미소니언자연사 박물관은 전시품이 너무 많아서 세세하게 돌아 볼 여유는 없었다. 그 중에서 단두대로 사라진 프랑스 왕비 마리앙뚜아네뜨{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어: 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는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 혁명군에 의해 단두대로 처형됨)가 걸었다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있었는데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저주의 목걸이라서 다른 보석과 달리 한곳에서 계속 보지 못하도록 돌아가도록 전시해 두었고 또 외국에서 전시된 예도 없다고 한다(목걸이를 옮기다가 공항으로 가던 큐레이터(학예사)가 사망하고 비행기도 문제가 생기면서 이를 옮기지 못하도록 한데서 생긴 유래라고 한다).  




<마리앙뚜아네뜨가 걸었던 목걸이>


그리고서 백관관이 마주 보이는 토머스제퍼슨 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의 벽면에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동한 곳이 한국전쟁기념공원과 링컨 기념관이었다. 링컨 기념관은 미국국회의사당과 마주보고 있는데 내부에는 유명한 연설문이 새겨져 있었다. 


링컨이야 말로 남북으로 갈라진 주를 통합되게 만들어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한다. 미국에서 4개의 전쟁기념공원이 있는데 첫째는 세계1,2차 대전,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이라고 한다. 


한국전쟁기념공원안에는 서울대상대 동문회가 늘 생화를 헌화하고 있었다. 기념공원에 쓰여진 글귀는 "Freedom is not free"였다. 가장 소중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가치이다. 그곳에 새겨진 전사한 미군이 5만명이었고 유엔군은 40만명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고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에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오직 자유를 위해 !


워싱턴 관광을 마치고 펜실베니아의 주도 해리스버그로 이동했다. 나이아가라폭포를 보기 위해서였다. 


꽤 먼 거리를 달려 해리슨버그에 도착하여 하루밤을 잤다. 나는 혼자 나와서 또 맥주를 살 곳이 있는지를 물었는데 호텔직원은 저녁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3일날 해리슨버그에서 에팔레치아 산맥을 넘기 위해서 몇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다. 동부 지역의 산맥은 험준한 것이 아니라 완만하였다. 가이드는 가면서 미국의 종교에 대하여도 이야기 하였다. 


미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이 지역에는 ‘아미시’족이 있다고 한다. 과거 스위스 등에서 캘빈의 종교개혁시에 박해를 피해 이주한 사람들인데 과거전통을 고수하면서 농업과 목수 2종류에만 종사하는데 인구는 약10만명 정도여서 곧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조사에 의하면 오히려 20만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이들은 지금도 전통 방법으로 밭을 갈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며 콧수염은 기르지 않고 턱수염만 기른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길거리에 가는 아미시 족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실제 보지는 못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강을 따라 올라갔다. 이 강은 ‘인디언의 눈물의 강’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과거 미국의 서민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앤드류 젝슨 대통령 시절에 인디언 이주 정책을 실시하면서 인디언 보호구역을 설정한 뒤 그곳으로 강제 이주하면서 인디언 들이 이 강을 따라 이동하였는데 출발한 인원이 2만명이었는데 최종 도착한 인디언은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미국인들이 독립정부를 수립한 이후도 계속 인디언을 무력으로 공격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1828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인디언에 대한 이주정책을 폈다. 


1839년 통과된 이주법(The Removal Act)은 즉시 시행되어 그해 10월 동남부지방의 체로키(Cherokee)족을 먼저 오클라호마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스캇트 장군은 부하들을 시켜 그 지역에 사는 체로키인들을 집합시킨 다음 짐승 떼를 몰고 가듯이 미시시피 강 쪽으로 내몰았다. 13,000명의 토속 인디언들은 사랑하던 고향땅을 떠나 3,250리(1,300km)떨어진 곳으로 이주했다. 


이 먼 길을 먹을 것도 입은 것도 없이 차가운 겨울날에 총을 든 병사들의 감시속에 걸어갔다. 이 기간 원주민들은 얼어서 죽고, 배고파 죽고, 도망치다 죽고, 총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심장마비로 죽는 등 무려 4,000명의 목숨이 길 바닥에 시체로 뒹굴고 있었다. 이 비참했던 행로를 「눈물의 행로(Trail of Tears)」라고 불린다(출처, 북미 원주민(인디언)의 역사중에서- |작성자 제갈 재원 선교사)



. 백인들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그리고 인디언들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짐작이 된다. 현재의 미국의 인디언 정책은 이들이 꿈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카지노를 그 지역에 허용하고 각종 혜택을 부여하여 놀고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고통의 역서를 배우게 하면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느끼게 되고 결국 자신들의 권리를 찾게 될 터인데, 백인들은 바로 자신들이 침략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는 인디언 지도자 세쿰테가 미군에 의해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미국의 대통령은 20년 마다 죽을 것이라고 저주하면서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그 이후 20년 마다 미국 대통령이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다만 최근에 케네디가 죽고 20년째 되던 해에 레이건에 대통령이 총에 맞았지만 살아서 암살당할 위기에서 겨우 넘겼다고 한다.  


위 산맥을 넘으면서 가이드는 미국의 돈에 대하여 설명했다. 1달러는 미국 독립군 사령관이자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2달라는 미국 독립선언의 기초를 닦은 토머스 제퍼슨, 5달러는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브러험 링컨, 10달러는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20달러는 독립전쟁에 참여한 전쟁 영웅이자 인디언을 학살한 앤드류 잭슨, 50달러 남북전쟁에서 북군 사령관인 율리시스 그란트, 100달러는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했지만 되지 못한 미국의 기초를 닦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아니면서 화폐에 인물이 담긴 이는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과 프랭클린인 셈이다.  


나이아가라에 도착하고서 곧바로 미국측 폭포를 구경하고 점심을 먹었다. 미국의 ‘바람의 언덕’이라고 명명한 코스에서 폭포밑에서 엄청난 폭포의 위력을 실감했다. 나중에 폭포 전체를 보고서야 그곳이 가장 작은 물줄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곳 영빈관이란 한인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가이드는 맥주를 시켜 주었다. 오랜 만에 맞보는 시원함이었다. 


점심을 먹고 제트보트를 타고 헬기투어를 하였다. 제트보트는 나이아가라 폭포하류에서 급류를 거슬러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스릴을 즐기는 것이다. 헬기투어는 폭포주변을 돌아보는 것인데 생전 처음으로 헬기를 탑승하였다. 이렇게 나이아가라의 선택관광에서 소요된 비용은 1인당 300달러 였지만 미국까지 와서 이런 기회를 돈 때문에 놓칠 수는 없었다. 실제 경험해 보니 그런 가치 만큼 재미는 충분했다. 




<헬기에서 본 폭포>


케나다 국경을 넘어서 캐나다폭포를 구경한 뒤 호텔로 들어갔다. 국경 심사는 엄격하였다. 캐나다로 넘어 온 뒤 캐나다측 폭포에서 무지개가 떴다. 가이드에 의하면 무지개가 뜨는 시간은 오후 4시 무렵에 볼 수 있는데 운이 좋았다고 한다. 그날 저녁 야경을 보고 즐기기로 하였는데 우리 가족 모두 너무 먼 거리를 와서인지 파김치가 되었고 그래서 혼자 밖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호텔 앞 Rock cafe가 있었지만 혼자 마시기도 그래서 호텔로 들어 왔다. 특이한 것은 나이아가라 관광지에서 술을 파는 곳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부모와 아이들이 나와서 저녁에 아이스크림이나 놀이기구를 타고 있었다. 


여행4일날(25일)나이아가라의 타워를 관광하고 유람선을 타고 폭포 밑까지 근접하여 폭포를 바로 밑에서 보았다. 




<나이아가라폭포밑에서>


또 스카이론 타워에서 본 폭포는 여전히 장관이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드넓은 땅은 끝이 없었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협곡의 폭포는 정말 장관이었다. 거대한 물줄기가 떨어지면서 내는 굉음과 에메랄드 물빛과 물보라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유람선을 타고 폭포밑까지 가는 코스는 꼭 경험할 필요가 있다. 


나이아가라에서 캐나다의 최대도시 토론토로 향하면서 중간에 포도와인너리를 견학했다. 포도농장에서 한국인이 해설하였고 주로 생산하는 아이스 와인은 한겨울에 따는 포도로 만든 포도주 였는데 맛이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그러나 이런 와인은 향긋하면서도 달콤하기는 하지만 술꾼들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어서 나는 사지 않았다.


버스는 계속 동쪽으로 달려 오후 무렵 토론토에서 시청을 구경하고 캐나다의 최고대학이라는 토론토대학을 둘러 보았다. 가이드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성공은 성적순이다”라며 열심히 공부하여 이런 대학에 들어가고 또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학 잔디밭에서 사진만 찍었지만 우리 아이들도 큰 꿈을 가지고 이런 대학에 도전해 봤으면 좋겠다. 




<토론토 대학에서- 사진속 왼쪽 첨탑이 없는 것은 학생들이 완성하라는 의미 >


토론토 인근 호텔에서 잠을 잤다. 이 호텔에는 수영장이 있었는데 아들과 같이 내려가서 수영을 하였다. 그런데 물이 너무 짠 물이었는데 나는 약품을 너무 많이 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은 수영장에서 농구게임을 다른 외국 친구들과 하다가 나왔다. 샤워를 하고서 인근에 있는 바(bar)에 들러 시원한 맥주를 한잔 했다. 빠텐더는 아들에게 음료수를 공짜로 주었다. 


여행5일날(26일) 몬트리올로 버스는 달렸다. 몬트리올은 최초 금메달을 목에 걸은 양정모가 출전한 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몬트리올로 가는 길은 캐나다의 광활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우측에는 온타리오 호수의 수평선이, 좌측에는 끝없는 평원의 지평선이, 앞으로 뻗은 도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도평선이, 하늘은 끝없는 푸르름이 있었다. 가다가 천섬에 들렸다. 


천섬은 세인트로렌스 강에 1860여개의 섬이 있는데 미국과 캐나다가 약 절반씩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섬의 소유는 개인소유인데 현재 미국측 섬에는 별장이 대부분 들어서 있는데 전체가 초록색캔버스에 정원을 갖춘 집들이 모인 한편의 수채화를 보는 듯 했다. 물에 거의 닿을 듯 한 섬에 별장을 지었는데 나는 홍수가 나면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가이드에게 물어 보았다. 가이드는 대서양에 조수간만의 차이가 거의 없고 오대호에서 거의 수량을 수용하기 때문에 수위가 불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천섬을 보고서 뷔페식으로 점심을 먹고서 한참을 달려 몬트리올로 들어서는데 멀리 성당이 보였다. 이 성당이 바로 성요셉성당이라고 한다. 통상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3위 일체설에 따르는데 카톨릭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높이고 있지만 예수의 아버지이자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지금까지 추앙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한동안 이 성당은 이단으로 취급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성에서 앉은뱅이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많이 일어나서 장애인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리고 몬트리올 시내를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산(몽로얄공원?)을 돌아 내려오면서 과거 몬트리올 올림픽의 메인 스타디움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이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곳에 물을 파는 상인이 어떻게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찬∼물’이라고 말하였다. 몬트리올은 올림픽을 한 도시중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정체 감소되는 도시라고 한다. 그래서 몬트리올과 퀘벡은 캐나다연방에서 분리하고자 주민투표까지 하였는데 부결되었다고 한다. 


몬트리올중심가는 한산하였고 시청 뒤에 조성된 파리 몽마르뜨 언덕을 본딴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공연도 하였는데 그 언덕에 균형이 맞지 않는 이상한 동상이 서 있는데 그 동상이 ‘넬슨’장군동상이라고 한다. 넬슨은 초대 캐나다총독이기도 한데, 프랑스계 사람이 많이 사는 몬트리올이어서 사람들이 넬슨장군 동상을 훼손하여 높이 만들었다고 한다. 또 인근에 내부 장식이 화려한 노테르담성당이 있다고 하여 가 보았지만 4시가 넘어서 보지 못했다. 인근 가게에서 딸아이는 펜을 샀고 나와 아들은 캐나다아이스하키팀유니폼을 샀다. 그리고 저녁에 랍스타를 먹었다. 맛이 환상적이었다(꼭 먹어보기를 권한다). 




<저녁식사로 먹은 랍스타> 


저녁 퀘벡으로 가다가 호텔에 들렀다. 그곳 호텔(HOlIDAY INN EXPRESS)에서 가이드와 저녁 맥주를 마시기로 하였고 그래서 호텔밖 점포에서 캐나다맥주(10%)를 사서 마셨다. 가이드는 프로리다주립대에 다니는 딸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딸과 너무 닯았다며 사진을 보여 주었고 또 한편으로 우리 아들을 귀여워했다. 


그는 미식축구를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처음 아르바이트로 시작하여 점포를 인수하고서 돈도 많이 벌었다가 또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돈을 잃기도 했다고 했다. 우리는 주로 미국 유학에 대해 물었다. 어쩌면 우리 아들,딸이 미국 유학을 가게 된다면 다음에 만날 수도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침 퀘벡시를 구경하고 프랑스향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퀘벡은 인디언 말로 협곡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퀘벡은 프랑스사람들이 1708년경 영국의 메이플라워호보다10년 먼저 도착하여 개척한 도시라고 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여러번 전쟁을 치렀고 결국 영국이 승리하게 되면서(프렌치 인디언 전쟁: 1754년-1763년) 모든 지배권이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무렵 쌓은 성곽이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그곳에서 관광을 마칠 무렵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몽모렌시폭포를 구경하기로 했다는데 결국 안전을 우려해 차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곧바로 점심을 먹기 위해서 캐나다식 뷔페식당으로 갔다. 많은 요리가 있었지만 배가 불러서 모두 맛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이제 캐나다 관광을 마치고 곧바로 보스턴으로 이동하기 위해 뉴햄프셔주의 주도 콩코드로 이동했다. 캐나다 국경을 넘을 때 버몬트주로 넘어가기 전 면세점이 있었는데 그곳은 술이 가장 싼 곳이었다. 그래서 향기가 좋다는 그린필드를 1병샀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술도 사고 싶었지만 술 욕심만 낼 수는 없었다. 국경을 넘으면서 펼쳐지는 광활하고 멋진풍광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믄 광경이었다. 콩코드호텔에서 6일째 잠을 잤다. 그곳 호텔의 식사는 별로였지만 호텔사장은 매우 친절하였다. 들어올 때 직접 나와 마중하고 호텔을 나갈 때도 차에 올라서 인사할 정도였다. 


곳 바로 보스턴으로 가는데 또다시 많은 비가 내렸지만 하버드대를 견학할 무렵에 비가 그쳤다. 하버드대를 가기 전 가이드는 아비리그대학 8개를 소개했다.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뉴펜실베니아, 브라운, 코넬, 프린스턴, 다트머스라고 한다. 하버드대는 우리나라학교처럼 학교 담장이 없고 굉장히 넓었으며 4-10키로가 된다니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하버드대 건물배치도>


미국의 대학은 공부를 하지않으면 졸업이 힘든다고 한다. 그래서 졸업을 하기 위해 각종 미신들이 있는데 하버드에는 하버드동상에 오줌을 누면 졸업한다고 하여 매우 더럽다고 한다. 그리고 하버드동상의 발을 만지만 학교에 입학한다고 하여 관광객들이 모두 발을 만지면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 외에도 중국관광객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가이드는 이런 중국 관광객을 보고서 앞으로 중국이 세계 제일이 될 거라고 말했다. 또 하버드대의 입,졸업식이 열리는 로마식 열주가 있는 건물이 도서관인데 이 도서관은 타이타닉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이 아들과 같이 타이타닉에 탔다가 배가 침몰 할 때 아들이 책을 가지러 간다며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나오지 못하였고 그래서 이 건물을 기증하면서 학생들에게 수영을 필수적으로 가르치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하버드에서 큰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탄 버스는 하버드를 출발하여 바로 옆에 있는 MIT공대를 지나쳐서 찰스강을 건너서 보스턴 거리를 구경했다. 시내 푸드마켓에서 자유식으로 식사를 했다. 새우스프를 먹었는데 너무 느끼해서 일본 우동을 더 사서 먹었다. 우리일행중 고1이라는 여학생은 푸드마켓에서 그곳 피아니스트가 잠시 치다가 비운틈을 타서 악보없이 피아노를 쳤는데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실력이었다. 옆에 있던 그 피아니스트가 박수를 쳐 주었다. 


그래서 내가 그 부모에게 물었는데 부모는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했는데 잘 안됐다며 한참 레슨받을 때는 월1000만원 정도가 들었다고 했다.  


뉴욕으로 가는 길에 쇼핑을 할 수 있는 우드베리로 갔다. 그곳에서 명품이 싸다고 하여 아내는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가이드는 2시간을 주었다. 명품매장을 보니 최신제품은 아닌 듯한 것으로 생각되는 제품을 전시해놓았다. 아내는 구찌 가방만 하나 사서나왔다. 명품가방이야기는 이제 10년 정도는 하지 않을 듯 싶다. 다시 뉴욕으로 와서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고서 야간투어를 했다. 


뉴욕의 거리는 신호등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일등국가의 일등시민 치고는 의아하다). 그래서 교통사고원인을 조사하면 신호를 지키고 걷다가 사고가 나고 오히려 지키지 않는 사람은 차를 살펴보고 피해가니 사고가 적다고 한다. 그리고 가는 곳 마다 공사를 하고 있고 또 지하철에는 쥐들이 득실거린다고 한다. 주변 명품매장도 보고 애플매장도 구경했다. 그리고 타임스퀘어에서 잠시 않아 뉴욕의 밤풍광을 즐겼다. 오는 길에 야경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었다. 어쩌면 홍콩의 야경보다 더 멋있었다. 




<야경을 배경삼아 가족과>


미국에서의 마지막호텔인 힐튼호텔에 투숙했다. 아침 뉴욕거리를 구경하고서 자유의 여신상을 보러 배를 탓다. 선착장에서 보는 옆에 있던 다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그 건설시점이 1900년 초라고 하는데 그 무렵 이정도 였으니 미국이 대단한 나라였음은 분명하다. 배(직접 자유여신상을 올라가려면 반나절이 걸린다고 한다)로 자유의 여신상을 둘러보고서 뉴욕의 거리를 보았는데 그 유명한 월가가 있었다. 점심은 한국식 식당에서 먹고 오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견학했다. 높은 곳에서 보는 뉴욕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저녁은 베트남 요리로 먹었는데 매우 맛있었다. 


뮤지컬을 보러 가면서 잠시 기다리던 틈을 타서 아들은 뉴욕양키스의 야구공을 샀다. 가이드가 여러번 이야기 했는데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오면 뮤지컬을 봐야한다고 하여 우리 가족 모두가 150달러(1인당)하는 맘마미아 뮤지컬 공연을 보았다. 영화와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나는 사실 졸았다. 


보다가 졸수 없어서 뒤로 나와서 서서 보니까 공연안내자가 왜 나와 서서 보느냐고 물었다. 나는 졸려서 서서 본다고 말하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뮤지컬 대화를 모두 알아들었다며 재미있어 했다. 


다시 투숙한 호텔로 돌아왔는데 너무 많은 일정을 소화해서인지 몹시 피곤해서 일찍 골아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처음 내렸던 JFK 공항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가이드와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가이드와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오랬동안 기대하고 기다려왔던 미국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장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렸다. 나에게는 수많은 미뤄놓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휴가가 휴가가 아니었다. 다시 치열한 삶의 현장에 되돌아 왔을 때 미국 여행은 꿈과 같았다. 




2014. 8. 23.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