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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홍콩여행기

by 권오갑변호사 2020. 7. 1.

홍콩여행기

 

나는 가족과 함께 2011. 1. 2.부터 5.까지 홍콩, 마카오, 심천을 패키지로 다녀왔다. 홍콩은 인구700만명으로 매우 좁은 국토(서울의 1.8)에 많은 인구가 살다보니 아파트는 좁으면서도 고층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새로 건축한 아파트외에는 대부분이 밖에 빨래를 걸어 놓고 있었는데 이는 아파트가 좁기 때문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아파트가 좁은 탓에 집은 간식 정도 해 먹고 잠자리가 주된 것이어서 식사는 대부분 밖에서 사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습도가 높기 때문에 우리의 가을정도의 날씨인 겨울에도 에어콘을 켜 놓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도로는 매우 좁은데도 차는 크게 밀리지 않았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그 이유는 차량의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국민소득은 약4만달러(한국의 2)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나 부의 불균형 등으로 삶의 질은 우리보다 못한 듯 했다. 홍콩의 부호는 세금을 많이 내기 때문에 거의 세금을 내지 않는 서민들과 위화감이나 불화는 별로 없다고 한다. 가이드는 실제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여유가 있어 살기 제일 좋은 곳이라고 위로 겸 말했다.

 

첫날 책랍콕 공항에 내려서 구룡반도를 거쳐 홍콩섬으로 가서 광동식으로 딤섬(점심)을 먹었다. 홍콩사람들이 주로 점심에 먹는 식사라며 만두, 뽂음밥, 탕수육 등이 푸짐하게 나왔다. 중국 식사에는 보이차는 늘 부족하면 채워 주지만 맹물은 사 먹어야 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찬물을 달라고 하니까 가이드가 가서 얼음을 가지고 와서 녹여서 먹으라고 했다. 나는 대부분을 잘 먹었으나 아내와 아이들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만두의 소 안에 중국 특유의 향료가 있어서 입에 맞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나서 홍콩섬으로 갔는데 구룡반도에서 홍콩섬으로 가는 길은 바다속으로 나 있는 수중 도로였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가이드는 홍콩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했는데 1주일중 3일은 로또 추점을 하고 2일은 경마를 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2일간(, )이 가장 지루한 날이며 활기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도박성 로또나 경마를 하도록 한 것은 영국이 홍콩을 점령 지배하면서 좁은 면적의 홍콩사람들이 갈데가 없고 희망이 없는 갑갑한 삶을 이러한 것들로 풀고 일확횡재를 꿈꾸며 불만을 돌리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모두 홍콩사람들의 일상화가 되어 하나의 생활양식이나 문화가 되었다고 한다. 홍콩섬의 해운대 격인 리펄스 베이에 가서 해변관광을 하고서 경마수익금으로 만들었다는 오션파크공원에 갔다. 오션파크를 케이블카로 가서 보고서 에스칼레이터로 내려 왔다. 케이블카는 긴 해안 절벽으로 길게 나 있고 홍콩의 섬들을 보기에 정말 좋았다.

 

                                             <케이블카에서-동생을 놀리는 누나>

      

가이드 말에 따르면 바닷가 내음이 나지 않는 것은 염분농도가 우리 바닷가 보다 낮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션파크는 우리나라 코엑스의 해양수족관과 비슷했지만 시설은 못한 듯 했다. 다만 중심 수족관은 몇층규모로 구성되어 있고 규모가 엄청났는데 그 안에 다양한 물고기와 있어서 볼만 했다.

가이드는 홍콩의 사회생활에 대하여도 여러 안내를 했는데 홍콩남자들은 보통 아침을 남자가 하고 자녀를 챙기고서 잠자는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나가고 부인은 늦게 일어나 쇼핑을 하고 오후쯤에는 친구들과 마작을 즐긴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도 남자가 지참금을 많이 내야 되기 때문에 여자를 가진 부모는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실제 법제도도 여자가 대우를 받는데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면 곧바로 처벌되지만 아내가 남편을 폭행하면 경찰이 아무런 제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위트를 담아 한 말이기는 하지만 여자가 대우받고 산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였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홍콩 남자들이 이러한 홍콩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인근 공장지대인 심천의 말도 잘 듣고 지참금도 필요없는 착한 중국여자와 결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홍콩 남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홍콩여자가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천대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학교는 다소 높은 건물로 이루어 져 있는데 학생이 뛰어 놀 운동장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을 받지만 유급제도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늙은 학생 즉 얼굴은 나이가 들었는데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이 바로 유급을 당한 학생이라고 한다. 홍콩의 대학은 9개가 있는데 모두 전세계150대 대학에 들어가며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은 정말 엘리트라고 한다.

저녁에는 현지식이라며 북경의 오리 등이 나오고 다른 여러 요리도 나오는 식사를 하고서 홍콩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야경을 보러 갔다. 날씨가 추웠는데도 많은 관광객들이 있었고 바람이 불어서 사진만 하나 찍고 바로 내려 왔다. 야경은 홍콩도 좋지만 서울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내려오는 수단은 기차로 내려 왔는데 기차가 올라가던 그대로 내려오기 때문에 45도로 뒤로 앉은 채 내려 왔다. 이 기차는 1882년경에 영국에 의해서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이때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말인데 참으로 놀라운 기술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와서 구룡반도로 가는 배를 타기전에 118층 빌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다시 구룡반도로 가서 저녁 불꽃쇼를 보았다. 배를 타고 건너면서 홍콩섬의 중심가 고층빌딩에는 각종 세계유명기업의 광고판이 빛을 발하였는데 그 중에는 삼성과 엘지가 있었다. 불꽃쇼는 구룡반도와 홍콩섬의 고층빌딩에서 빛으로 번갈아 가며 레이져를 쏘기는 했지만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홍콩야경>

 

그리고서 나서 이층버스를 타고 야시장에 도착한 뒤 홍콩의 야시장을 구경했다.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 겪인 야시장은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별로 살 것은 없었다. 우리나라 제품이 더 좋은 듯 보였고 가격도 그다지 크게 쌓지도 않았다. 그래서 아들 녀석 벤10 가방만 70달러(우리나라 돈 1만원)주고 사가지고 나왔다. 홍콩에도 우리나라처럼 길거리 음식(떡볶기, 어묵이나 순대)과 같이 길거리 음식이 있는데 빵종류는 특유의 향이 있어서 아이들이 싫어했고 분식점 같은 곳도 주로 돼지고기를 삶은 요리가 있었으나 특유의 향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도 싫어했다. 나는 그래도 맛을 보고 싶었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완강히 근처에 가는 것을 싫어해서 포기했다. 저녁 10시경이 돼서야 호텔로 돌아 왔다.

 

그 다음날 오전에 윙 타이신 사원을 가서 홍콩인들의 일상생활과 종교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홍콩인들의 일상을 볼 수가 있었는데, 가이드는 홍콩인들이 나이가 들어 사원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데 곧 죽을 노인들이 무엇이 간절한 지 그들의 기도가 간절하다고 했다. 실제 홍콩은 일종의 다신교라고 할 수 있다. 사원에는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관우상 또는 불교의 약사여래상 등이 주요 신처럼 등장해 있고 이에 대한 각종 구복적인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건강과 돈폭탄을 기원한다고 한다. 절절히 기도하면서 필통에 연필을 꽃아 둔 것 처럼 통안에 각종 문구가 적힌 편심을 넣고서 열심히 흔들면 그중 하나가 빠져 나오는데 이것을 가지고 사원 아래에 가면 점쟁이가 점을 풀어서 설명을 해 준다고 한다. 실제 어느 노인이 뽑은 심의 문구를 손바닥에 열심히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정말 신통할 정도로 잘 맞는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기독교라고 그냥 지나쳐서 정원만 돌아보았다. 그리고 패키지 여행의 단점이기도 하지만 쇼핑관광을 해위서 가이드가 안내한 보석상을 둘러보았다. 가이드는 홍콩은 생산시설이 전혀 없고 단지 생산하는 것은 아이밖에 없다고 말하였다. 그래도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보석가공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화려했지만 우리를 비롯하여 대부분은 보석을 구입하지 않았다. 보는 눈이라는 대부분이 같은 모양이다. 가이드는 '너무 안산다'며 이러면 자신은 뭘 먹고 사느냐며 농담섞인 진담을 했다. 아마도 가이드의 수입중 일부가 쇼핑관광으로 인한 수입으로 보였다. 다음 쇼핑장소로 데려간 곳이 차()를 파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보이차와 전칠(피로를 해소하고 당뇨, 눈에 좋다는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 생강 같은 모양의 뿌리)를 샀다.

그리고 이동하여 먹은 점심은 현지식이 아니라 우리나라 식이었고 김치찌개와 된장찌게가 나왔다. 오랜만에 아내와 아이들이 잘 먹었다. 오후에는 선택 관광이었으나 홍콩 바로 인근의 중국에 있는 심천관광(이중 민속촌만)을 가기로 했다. 홍콩달러서 4명가족당 700달러였으니 꽤 비쌌으나 그래도 언제 다시 올수 있겠느냐라는 생각에 가기로 했다. 전철같은 기차로 갔다. 현지에 도착하니 현지 조선족 가이드가 심천에 대하여 소개를 한 뒤 물품구매소에 들여서 물건을 사도록 했지만 가이드도 정중하게 굳이 살 필요가 없지만 절차상 들리게 되어 있다며 양해를 구하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호랑이 파스를 1통 샀다. 파는 안내원은 실제 호랑이 뼈가 들어 있지 않고 사향이 들어 있어서 효과가 좋다고 설명하였다. 가이드는 처음 버스의 가장 앞쪽에 앉은 관광객에게 뒤로 가라고 하면서 객사를 하더라도 법이 있는 홍콩에서 해야 보상받지 중국땅인 심천에서 사고나면 골치아프다며 농담조로 양 제도의 차이를 설명했다. 실제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홍콩은 정비된 법제도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지만 심천은 공산주의 하에 자본주의를 시험적으로 도입한 곳이기 때문에 홍콩에 비해 제도가 현저하게 떨어 질수 밖에 없었다. 심천은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한 뒤 홍콩과 가장 가까운 곳인 이곳 심천에 특구를 만들어 자본주의모델로 시험하였다고 한다. 처음 자본이 없어 화교자본을 끌어 들여 특혜를 부여하여 성공하자 이를 주변으로 확대하였다고 한다. 심천은 서울의 2배 정도에 이르고 실업률, 물가 특히 부동산 값은 상당히 비싸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홍콩의 아파트가 오밀 조밀하고 좁게 지어진 것과 달리 심천의 아파트는 베란다가 있는 등 다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심천의 민속촌은 중국의 명물을 축소한 소인국이 있고 여러 소수민족(중국에는 한족을 포함하여 56개 소수민족이 있다고 함)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 하일라이트는 공연이었다. 저녁(오후 해질 무렵)의 공연은 우리나라 민속춤을 비롯한 민속공연이 주였고 밤에 하는 공연은 중국의 역사를 장대한 스케일로 표현한 것이었다. 웬만한 국제대회 메스게임인 양 동원된 인원이 엄청난 규모였다. 감동 보다는 역시 중국 다운 규모와 화려함이 있었다. 그리고 중국 각지의 미인들은 다 불러 모아 놓은 듯이 화려했고 이중 예쁜 여자는 공주 스타일로 나오고 인물이 좀 못한 여자는 접시돌리기나 다른 조역을 담당하는 것을 보면 여자에게 미모는 어디서나 중요한 듯하였다.

 

                                                          <심천공연>

 

이날 저녁에는 광동식의 식사를 했는데 홍콩에서 먹었던 광동식 식사보도 맛이 못했지만 북경식 오리요리는 오리 껍대기를 튀겨서 쌀로 만든 듯한 전에 싸서 소스를 찍은 야채와 함께 먹는 것인데 아이들이 잘 먹었다. 이날 홍콩으로 돌아와 호텔 1층에서 시계와 우산을 사고 나는 홍콩에 와서 술 맛을 보지 않고 갈수 없어서 고량주 1병을 사서 혼자 마셨다. 술은 우리 나라에 비하여 쌌다. 그리고 뒤끝도 깨끗했다.

 

3일째 마카오로 배를 타고 갔다. 마카오는 1557년 명나라때 포르투갈인에게 거주권을 준 이래 포르투갈인이 거주하다가 1887년 청나라와 정식조약에 의하여 포르투갈영이 되었다가 199912월 중국에 반환되었다. 마카오도 홍콩과 같이 50년간 현체제를 약속받아서 1국가 2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자치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카오에서 먼저 본 것이 베네시안 카지노였다. 마카오의 카지노는 '스탠리 오'라는 사람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철저하게 풍수에 근거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점장이에게 물어보니까 망치소리가 그치지 않아야 한다고 해서 지금도 계속적으로 공사를 한다고 한다. 스텐리 오(이 카사노바 같은 사람은 현재 90세 정도인데 부인이 4명이고 자녀가 18명이라고 한다)가 걱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카지노에서 돈을 따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끊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카지노내에는 3개가 없는데 시계가 없고 창문이 없고 거울이 없다. 그 이유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게 하여 어둠을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며 거울에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보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우리나라 백화점에 가보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거울이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실제 천정도 하늘처럼 그림을 그려서 전부 덮어 놓았다. 마카오에는 택시가 2가지 색이 있는데 카지노에 들어갈 때는 검은색 택시로 들어가고 나갈 때는 노란 택시로 나가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주변의 색을 압도하는 검은색으로 정신을 오로지 도박에만 집중하고 나올 때는 다시 돈을 벌어 오라고 노란색 택시를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중국이 마카오를 반환받은 뒤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서 외국자본을 허용하여 스텐리 오의 카지노 외에 샌즈(Sands Group)그룹의 카지노도 허용하여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의 대외정책의 기본인 일종의 以夷制夷식 사상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이드는 이곳에서 신정환처럼 되지 말 것을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누구나 신정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룰렛게임을 구경하고 실제 슬롯머신을 한 번 했는데 슬롯머신은 1번 베팅할 때 마다 최소 10홍콩달러(한국돈 1500, 이 기계는 배팅을 30, 50 등 몇 가지로 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물론 베팅이 높은 기계도 있음)로 된 가장 안전한 기계로 했는데 결국 100달러 모두 날렸다. 그런데 본전 생각이 들어서 더 큰 돈(500달러)을 꺼 냈다가 '아 이렇게 망가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카지노를 나왔다. 카지노에는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도 자주 들린다고 한다. 카지노에서 VIP가 하는 곳은 따로 있는데 이곳에서는 카드 한판에 거는 돈이 1억원 정도라고 한다.

내가 카지노를 구경할 때 아내와 딸, 아들은 주변 점포를 구경하였다. 어느 외국인이 딸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는데 딸이 'South Korea'라고 답하자 '오 김정일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외국인들에게 남북이 잘 구별되지 않고 북한의 김정일이 유명인사로 통하는 듯 했다.

카지노에서 나와서 바로 옆에 있는 3D관이 있었다. 내용은 유치하지만 호랑이와 용이 날아다니며 포효하고 여의주를 물고 불을 품는 모습에 아들만이 깊은 감동을 받은 듯 했다.

그리고 간곳이 성 바오로 성당과 세나도 광장이었다. 성 바오로 성당은 다 타고 성당 앞 벽면만 남아 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바오로 성당>

 

성당이 불에 탄 이유는 포르투갈군이 네덜란드군이나 스페인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달리 주둔할 공간이 없자 할 수 없이 성당에 군이 주둔하였는데 정작 폭격에 의하여 불탄 것이 아니라 포르투갈군이 밥을 해 먹다가 실화하여 불에 탓다고 한다. 성벽 앞면에는 예수의 생애와 천국으로 가는 문에 대한 조각이 있어서 이것이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여기서 기념촬영을 한 뒤 아래에 있는 세나도 광장으로 가는 길에 계란빵과 육포 맛을 봤다. 계란빵은 정말 맛있었는데 육포는 중국 특유의 향 때문에 아이들이 싫어했다. 이곳 계란빵을 우리나라에서 팔면 아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세나도 광장에서 사진을 찍은 뒤 샌즈구룹의 카지노(永利:Wynn)앞 분수대에서 물과 불이 어우러진 분수쇼를 보았다. 정말 장관이었고 주변 카지노의 화려한 불빛과 어울려 신기루와 같았다.

 

                                                            <샌즈카지노>

 

그리고 포르투갈식 저녁식사를 했다. 감자 스프와 빵, 스테이크류가 나왔다. 나는 맛있게 먹었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대부분 남겼다. 식사를 잘 먹는 나에게 아내와 아이들은 현지사람 적응이 다 되었다며 여기서 살아라며 농담했다.

저녁 타이파 스퀘어 호텔에서 숙박을 했는데 호텔은 홍콩의 판다 호텔보다 시설이 훨씬 좋았다. 아침을 호텔에서 부페로 먹고 홍콩으로 배를 타고 돌아 왔다.

홍콩에서 점심을 한국식으로 먹고서 쇼핑관광을 하였는데 라텍스(고무)로 된 베게를 샀다. 공항으로 가면서 가이드는 홍콩의 장례문화에 대하여도 설명을 했다. 홍콩에는 묘지가 주거지 바로 옆에 있는데 그래도 항의를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묘지의 면적이 좁아서 관이 크면 비슷틈이 세워서 매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의 귀신 강시는 바로 홍콩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리가 저려서 뛴다고 한다. 그리고 사자(죽은자)가 하늘에 가도록 돈을 불태워 노자돈으로 사용하고 그외에도 각종 자동차나 여러 물품 모양을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불태우는 것은 사자가 저승사자에게 뇌물로 줘서 편하게 저승에 갈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다시 책랍콕 공항에 도착하여 쇼핑을 하려고 했는데 면세점의 가격이 한국의 백화점가격보다 싸지 않아서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쇼핑천국이라는 홍콩이 환율에 800-900원 정도라면 괜찮지만 1000원이 넘는 지금은 쇼핑에 별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인지 다른 한국 사람들도 별로 사지 않는 듯 했다.

 

이렇게 꿈 같은 시간이 다 흘러 케세이 퍼시픽 항공사의 비행기는 어느덧 한국에 도착하였고 다시 찬바람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역시 한국이 살기 좋다는 위로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