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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

by 권오갑변호사 2020. 3. 5.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를 읽고

권 오 갑

사실 중국사는 자세히 배우면서 일본사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단지 몇 개의 막부시대의 이름만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역사책에서는 일본에 한자를 전해 주었고 그럼에도 왜구들이 노략질을 하고 왜란을 일으켰다는 정도와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했다는 정도만 나와 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에서는 일본이 어떤 이유에서 발전을 했는지 조선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었는지를 객관적 시각으로 보려고 하였다.

 

저자는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왜 우리가 일본에게 뒤쳐졌을까라는 접근보다 왜 일본은 우리보다 강했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일본 도쿄의 200년 된 소바집을 통해 당시 일본의 문화와 도시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것으로 일본의 근대사를 접근해 간다. 도쿄는 매립을 한 곳이었으므로 도쿄 한가운데 소바집을 열기위해서는 메밀을 삶는 물을 계속 갈아주어야 하는데 그 물의 공급은 대대적 치수사업을 통해 상하수도가 마련되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에도시대(도쿠가와이에야스 막부가 시작된 1603년부터 막부가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한 1867년까지 260)에는 어떻게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일본이 발전하게 된 원인을 찾아보게 된 동기이다.

 

저자는 그 원인을 2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참근교대제이고 다른 하나는 천하보청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도쿠가와이에야스가 도쿄를 개척하게 된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한다. 에도는 원래 버려진 땅이었는데 도요토미히데요시가 도쿠가와이에야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에도로 옮기도록 한 것에서 시작된다. 당시 에도는 지형적으로 강이 바다와 만나는 습지여서 농사를 제대로 짓지도 못하였고 배들이 접근하기도 어려웠으므로 항구로도 사용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이에야스는 인내심과 끈기로 개척에 착수하였다. 이에야스는 먼저 성을 보수하지 않고 가신들의 주거지를 최우선으로 개척하고 물자 보급로확보를 위한 토목공사에 착수한다. 그래서 남북의 강을 동서로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고 배가 성까지 직송될 수 있는 호리를 개통하였다. 생활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일본 최초의 수도인 고이시카와 상수(上水)’를 건설하였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인 상수와 쓰고 난 물을 버리는 하수(下水)라는 어원도 여기에서 기원한다. 이러한 수리시설을 위해 집수장 및 수문시설을 짓고 시내 곳곳에 지하 또는 반지하로 수관을 매설하여 정수한 다음 바로 마실 수 있도록 공급하였다. 이를 위해서 43킬로를 1키로마다 2미터의 표고차가 유지되도록 건설하였다. 이에야스는 에도 개척에 힘을 쓰는 동안 조선정벌에 동원된 군사징발도 제외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도시건설에 총력을 쏟을 수 있었다(18세기 초에 에도는 벌써 100만대도시가 되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의 동군이 히데요시 아들이 주축이 된 서군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격파하고 이에야스는 쇼군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신하가 간청하는 오사카나 교토를 뿌리치고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권력을 잡은 이에야스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닌 지방영주인 다이묘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이다. 즉 다이묘는 에도에 반드시 1년 단위로 각 번의 다이묘(번주)가 정기적으로 출부하여야 하는 제도로서 일종의 인질제도다. 에도시대의 통지구조는 쇼군과 다이묘간에 봉토를 매개로 하는 은혜와 충성 관계를 기초로 하는데 다이묘는 봉토를 하사받고 그 토지에 부속된 인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고 그 충성의 표시로 군역과 천하보청 역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지방분권적 요소와 중앙집권적 요소가 혼재하는 이중구조의 통지체제를 막번(幕藩)체제라고 한다. 막번체제에서 중요한 특징은 막부가 각 번에 대해 징세권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부는 참근교대제와 천하보청으로 번주를 견제하려고 한 것이다.

 

천하보청(天下普請)은 쇼군이 다이묘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를 말한다. 징세권이 없는 쇼군에 대해 다이묘들은 충성 서약으로 군사적 지원을 위한 군역의무를 지고 있는데 이러한 군역을 다른 형태로 부담시킨 것이 바로 청하보청이다. , 군역의 연장선상에서 성곽축성, 제방, 도로건설 등 전쟁기간시설과 관련공사를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를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천하보청을 발령하여 매립사업과 소토보리(에도성 바깥 해자)조성, 에도성 축조 등 토목사업을 했는데 그 성과를 충성의 판단기준으로 삼았다. 각 번은 이러한 사업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거래하거나 인력시장에서 구하였다. 이 때문에 자본, 자재, 전문인력이 거래되는 시장이 형성되고 이에 필요한 행정력 강화와 세수증대를 통한 비용마련을 위해 번은 개간에 힘을 온 기울였다. 만일 중앙에서 세금을 징수하여 결과물을 만들었다면 징세과정의 왜곡과 착취가 있고 그리고 집행에 있어서 관리비용이나 매몰비용, 중간착복이 있었을 것이지만 천하보청은 그러한 증발 없이 실물 인프라로 나타났다.

참근교대제는 말이 쉽지 매년 다이묘들이 가족과 함께 에도에 오기 위해서는 막대한 교통비와 물자가 필요하고 도로정비와 숙박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에도에 머무르는데 비용도 감당해야 하고 또 막부에게 바치는 헌상금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다이묘들의 재정적 부담이 매우 컸다(수입의 50~60% 지출). 이렇게 다이묘들이 에도 출입을 하는데 교통요지에 숙박업이 발달하고 도로가 확충되었으며 자재운송을 위한 해로와 수로가 정비되었고 해운망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사업에 든 돈이 상인과 노동자의 수입으로 이어지고 부유층은 조세부담이 줄어들었으며 이러한 먼거리의 이동에 따른 화폐경제가 발달하였다. 영주들이 가을 수확을 기다리지 못하고 미곡을 담보로 현금을 대출받아 사용하는 대부업, 지역간의 화폐를 교환하는 외환, 신용결재서비스 등의 금융업이 발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교제생활을 위한 외식업과 문화(출판, 공연, 향락산업)도 발달되었다. 참근교대로 인한 인적 교류가 정보의 교류통로가 되면서 민족의 이질성이 동질성으로 바뀌었고 서양세력에 대한 통합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경제분야가 신분제도에도 영향을 미쳐서 무사계급보다 조닌(町人)’이라는 도시서민계급이 성장하였고 이들이 부를 축적하여 대상인들이 되면서 외부 사정과 변화에 반응하고 실용적 사고를 바탕으로 훗날 근대화의 인적 자원이 되었다.

 

위와 같은 에도시대의 통치구조와 제도로 인하여 여러 산업이 발달하였는데, 여행의 대중화가 이미 이때 실현되었다. 이는 사사참예(일본 건국신화의 상징인 이세신궁 참배)라는 종교적 동기와 맞물려 17세기 후반에는 이동이 제한되었던 농민도 참배를 빌미삼아 쓰코테가타(通行手形)를 발급받아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물론 여행은 도로가 정비되고 숙박 등이 기반시설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천, 유적 등의 여행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고()가 유행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적립금을 모으고 추첨이나 투표를 통해 이세참배자를 선발하는 것이다. 또 이세신궁부근에 숙박시설을 비롯하여 참배, 기념품, 주변명소, 여흥거리 등을 안내하고 주선하는 사람을 오시(御師)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여행가이드인 셈이다. 이러한 여행의 자유와 관광이 외부세계에 대한 탐구욕, 향상심, 통합의식이라는 근대사상의 맹아에 기반이 되었다.

또한 중요한 분야가 출판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자 유럽의 선교사를 통해 활판인쇄술이 상용화되었고 책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출판문화 발전의 결정적 계기는 17세기 말 오사카에서 발간된 이하라 사이카쿠의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이라는 오락소설이 전대미문의 히트를 치면서 이다. 그 이후 책의 대중소비시장에 눈을 뜨면서 대중출판물 시장이 형성되고 최초의 만화라고 볼 수 있는 구사조시가 유행하고 장편소설이 유행하였다. 이때 나타난 것이 바로 저작권과 같은 판권개념이다. 목판은 제작하는데 숙련기술자의 시간과 공이 들어야 하는데 출판에는 고료 외에 판목제작에 상대한 자본이 투자되어야만 했으므로 리스크가 큰 투자였다.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서 1000부 이상이 판매되어야 했다. 이러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동업자 나카마(仲間)를 구성하였다. 판목에 대한 소유 및 이용권이 출판업자에게 인정되면서 소유, 양도, 분할이 가능하게 되었고 출판업자들이 권익보호를 위해 조합을 만들었는데 조합원부에 판권을 등록하면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출판, 문화가 발달하면서 정보전달매체로서 자연재해, 치정사건 등의 소식을 낱장 형태로 거리에 판매하는 소식지가 있었는데 이를 요미우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에도시대에 상업자본과 맞물려 광고지라는 새로운 종류의 인쇄물이 등장하였고 이러한 광고지를 히키후다라고 불렀다.

이렇게 발달한 인쇄술과 더불어 지식인들은 서양의학에 눈을 뜨면서 인체의 내부구조를 파악하고 각 기관의 기능과 역할, 상화관계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해부서로서 1771년 난방의학(네덜란드 의학)에 관심을 가졌다. 나카가와 준안은 스기타 겐파쿠에게 서양의서인타펠 아나토미아를 구매하게 하고서 이를 보고서 실제 사형수의 인체를 해부하고 위 타펠아나토미아를 번역하게 된다. 네덜란드어를 해석해 가면서 단어를 만들어 1774해체신서가 출간된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신경, 동맥, 연골 등의 단어는 바로 이때 인체기관에 부여된 이름들이다. 이를 토대로 의학계에서는 탐구정신과 성실함으로 이미 1804년 하나오카 세이슈가 에테르를 이용한 유방암환자를 수술하는 전신마취 외과술이 이루어졌다.

또한 놀라운 분야가 지도분야이다. 원래 양조장을 운영하던 이노는 50세에 장남에게 사업을 물려주고 천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다. 에도로 간 그는 당시 천문학의 1인자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문하생이 되어 관측기구를 도입하여 자신의 집을 천문관측소로 개조하였다. 그는 일본 최초로 금성이 일본의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측하여 기록하였다. 그는 지구의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서 지구상의 두 지점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북극성이 관찰되는 각도를 측정하여 두 각도의 차이를 비교하면 위도의 차이를 알 수 있고 두 지점간의 정확한 거리를 알면 위도의 차이를 대입하여 지구의 외주를 계산할 수 있다는 발상을 하였다. 이를 위해서 이노는 직접 에도에서 일본의 북쪽 끝단인 에조치(홋가이도)까지 걸어서 거리를 실측하게 된다. 1800년 이노는 측량여행을 떠나는데 6개월간 측량을 하면서 돌아와 지도를 제작하였다. 지도의 정확성과 치밀함에 막부가 감탄하고 동일본 전체에 대한 지도제작을 의뢰하였다. 그는 1800년에서 1816년까지 17년에 걸친 집념으로 복잡한 일본 해안의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오차 보정계산법을 고안하여 지도를 제작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18년에 죽었다. 지도는 그 후 제자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때 완성된 지도는 1821년 막부에게 진상되었는데, 그 지도의 규모와 정확성은 당대에 제작된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막부는 정확성에 놀라 공식문서보관소에 비장하고 외부 유출을 금지하였다.

또 주목할 부분이 바로 서양책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해체신서가 출간된 후 번역에 대한 욕구가 솟아났으나 서양책을 번역할 사전이 없었다. 그래서 난일사전작업에 착수하는데 산바쿠는 의사출신으로 난불사서(프랑스인 프랑수아 할마가 집필하여 1706에 초판이 발행된 네덜란드-프랑스어 사전)를 소개받고 이를 모델로 시작하였다. 네덜란드사전이 없었으므로 난불사서에서 알파벳 순서로 네덜란드어 표제어를 나열하고 네덜란드어로 단어의 뜻을 설명하는 주석이 붙여있던 것을 프랑스어는 제쳐두고 네덜란드어 주석을 활용하여 사전을 만든 것이다. 13년에 걸친 노력 끝에 1796년 최초의 난화사전이 탄생하였다. 그 후 보다 본격적인 난일사전은 1811막부의 천문방의 부속기관에서 담당하였는데 막부의 명을 받은 두프는 A~T까지 번역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 이후 1833년이 되어서야 초고가 완성되었다(통포사전, 두후하루마). 이러한 두루하루마와 함께 제작된 또다른 사전이 영일사전이다. 이는 18088월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국기를 단 페이튼호가 접근하여 소란을 피웠으나 격침하지 못하고 물, 식량, 연료를 제공해 주었다. 막부는 이를 계기로 경비책임을 물어서 사가번의 중신과 나가사키 부교를 할복하게 하고 영어와 러시아어를 배울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1811안게리아겐고와케라는 사전이 발간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바로 이러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긴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 외에도 일본의 도자기 문화와 섬유혁명, 화폐통일에 관한 부분도 흥미롭다.

 

결국 애도시대 말기 내부 모순과 서양세력의 압력에 직면하여 일본의 지식인들은 문명의 의미에 대해 숙고한다. 일본도 서구열강의 힘에 의해서 개항되고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지만 일본은 사법 제도가 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탓으로 이해하고 그들로부터 인정받는 제도를 구축하여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들 법제를 공부하고 외국전문가를 초빙하여 법제의 근대화에 매진하여 1880년 형법과 형사소송법, 1889년 헌법, 1896년 민법 등 6법을 제정하였다. 그 후 일본은 1892년 포르투갈의 영사재판권을 포기시키고 1894년 영국으로부터 사법주권을 회복하였다.

 

일본은 그렇게 역사를 바라보고 그렇게 극복하는 것이 설욕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없는가, 이것이 한국의 역사관이 답을 찾아야 할 올바른 질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